이타쿠라 시게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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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쿠라 시게히로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그는 이타쿠라 시게타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683년 아버지의 은거 후 가문을 계승했다. 1702년 무츠 후쿠시마로 전봉되어 후쿠시마 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번의 재정을 확립하는 등 번정의 기초를 다졌다. 1717년 장남 시게야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이듬해 시게야스가 사망하자 손자 가쓰사토를 후견하다가 1721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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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시게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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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씨명 | 이타쿠라 씨 |
이름 | 이타쿠라 시게히로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간분 9년 1월 1일 ((1669년 2월 1일)) |
사망 | 교호 6년 윤7월 17일 ((1721년 9월 8일)) |
관위 | 종5위하 가이노카미 |
주군 | 도쿠가와 쓰나요시 → 이에노부 → 이에쓰구 → 요시무네 |
번 | 시나노사카키 번 번주 → 무쓰후쿠시마 번 번주 |
부모 | 아버지: 이타쿠라 시게타네 어머니: 가토 나오야스의 양녀 (히토쓰야나기 나오쓰구의 딸) 양아버지: 이타쿠라 시게나오 |
배우자 | 정실: 가메이 고레마사 딸 |
자녀 | 이타쿠라 시게요시 |
2. 생애
이타쿠라 시게타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정실은 카메이 모리마사의 딸이다. 아버지 시게타네가 숙부 이타쿠라 시게나오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본가로 돌아온 후, 시게히로가 대신 양자가 되었으나 1681년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와 후계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촌 이타쿠라 시게노부와의 후계자 문제로 가신들 사이에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1683년, 아버지 시게타네가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세자 문제와 가문 내 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나노 사카키로 좌천되어 은거하자, 시게히로는 그 뒤를 이어 가문을 계승했다. 이때 영지 중 2만 석을 시게노부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3만 석을 다스리게 되었다.
1702년 무츠 후쿠시마로 영지가 옮겨지면서 진야 다이묘에서 성주 다이묘로 격상되는 등 가문의 위상이 높아졌다. 1704년 이후에는 후쿠시마성을 수축하고 성 아래 마을을 정비하며 번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1717년 장남 시게야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이듬해 시게야스가 급사하자 1721년 53세로 사망할 때까지 양손자 이타쿠라 가쓰사토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2. 1. 가문 계승과 갈등
이타쿠라 시게히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실은 카메이 모리마사의 딸이다.시게히로의 아버지 시게타네는 한때 숙부(시게히로의 큰 숙부)인 기하타 이타쿠라 시게나오의 양자였다. 시게타네가 칸분 12년 (1672년)에 생가·본가로 돌아간 후, 아들 시게히로가 대신 시게나오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엠포 9년 (덴나 원년, 1681년 9월 12일)에 시게타네에게 돌아와 후계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원래 아버지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사촌 이타쿠라 시게노부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가신들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덴나 3년 (1683년), 아버지 시게타네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세자 문제와 가문 내 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나노 사카키로 좌천되어 은거하자, 시게히로는 그 뒤를 이어 가문을 계승했다. 이때 영지 중 2만 석을 시게노부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은 3만 석을 다스리게 되었다.
겐로쿠 15년 (1702년) 12월 21일, 무츠 후쿠시마로 영지가 옮겨졌다. 이 전봉은 시게히로와 이타쿠라 가신들에게 큰 기쁨이었는데, 이는 진야 다이묘에서 성주 다이묘로 격식이 상승하고, 시고석 또한 기쿠마즈메에서 카리마즈메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로(家老) 마쓰바라 주로에몬을 성대(城代)로 후쿠시마에 파견하여 후쿠시마성을 인수하도록 했다. 이후 호에이 원년 (1704년)에 시게히로 자신이 후쿠시마에 들어가 후쿠시마성을 보수하고 성 아래 마을(조카마치)을 정비했다. 또한 번의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연공(세금) 징수에 힘쓰며 번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교호 2년 (1717년)에 가문의 수장 자리를 장남 시게야스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교호 3년 (1718년)에 시게야스가 갑자기 사망하자, 교호 6년 (1721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양손자인 이타쿠라 가쓰사토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2. 2. 무쓰 후쿠시마 번주
겐로쿠 15년 (1702년) 12월 21일, 무쓰국 후쿠시마로 영지가 옮겨졌다. 이 전봉은 시게히로와 가신들에게 큰 기쁨이었는데, 이는 기존의 진야 다이묘에서 성주 다이묘로 격이 오르고, 에도 성 내에서의 대기실 자리인 시고석도 기쿠마즈메에서 다이묘들이 앉는 가리마즈메(雁間詰)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처음에는 가신인 마쓰바라 주로에몬(松原 주로右衛門)을 성을 관리하는 성대(城代)로 삼아 후쿠시마에 파견하여 후쿠시마성을 인수하게 했다. 이후 호에이 원년 (1704년)에 시게히로 자신이 직접 후쿠시마에 들어가 후쿠시마성을 수리하고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으며, 성 아래 마을인 성하 마을을 정비하고 번의 재정을 확립하기 위해 연공 징수에 힘쓰는 등 번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교호 2년 (1717년)에는 가문의 가독을 장남인 시게야스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교호 3년 (1718년)에 시게야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교호 6년 (1721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양손자인 이타쿠라 가쓰사토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2. 3. 은거와 사망
교호 2년(1717년)에 가독을 장남인 시게야스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그러나 이듬해 교호 3년(1718년)에 시게야스가 급사했기 때문에, 교호 6년(1721년)에 53세로 사망할 때까지 양손자 이타쿠라 가쓰사토를 후견했다.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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